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충격적이었던 선박 납치 사건
(사건의 배경인 경주호의 모습)
1960년 12월 15일 311톤의 여객선인 경주호는 승객 130여명을 태우고 목포를 떠나 제주로 가고 있었다. 어느새 날이 어둑해지고 승객들은 한명씩 잠에 들었다. 오후 8시 경주호는 맹골군도 해역을 지나갔을 때였다. 갑자기 승객 26명이 권총과 수류탄 단도를 들고 조타실,기관실,여객실에 나뉘어 침입했으며 이들은 항해사에게 칼을 들이밀며 키를 서북쪽으로 돌리라고 강요했다. 한편 이 경주호에는 군인이 6명이 있었는데 이들은 이 군인들을 발견하고 격투가 이어졌으며 4명은 압도적인 일당들에게 구타를 당했지만 2명은 일당들에게 끌려갔다.
(일당들에게 끌려간 군인들)
당시 이들 일당에게 끌려간 군인은 오성택 상병과 김오채 일병으로 둘다 24살이였다. 이들은 일당들에게 살해당한 뒤 그대로 바다에 수장이 되었다. 오성택 상병과 김오채 일병 모두 제주 출신으로 휴가를 받고 귀향길에 이러한 참변을 당했으며 오성택은 아내와 세살 난 딸이 있었다.
한편 일당들은 선장실에 있던 조타수인 박복순에게 배를 중공쪽으로 돌리라고 했다. 박씨는 자신은 키를 잡았을 뿐 항로에 대해 아는 바가 없어서 자신이 항해를 하면 암초에 부딪힐 수 있다고 했으며 이에 어쩔 수 없이 선장인 이계룡에게 지시했고 이 선장은 이 일당들이 해도를 모른다고 판단해 중국으로 가는 척 다도해 지경을 배회했다.
이후 아침에도 다도해 주변을 배회하던 경주호에 있던 기관장인 기회를 봐서 교묘히 엔진을 조작해 고장이 나게 했다. 엔징 고장이 발생한 경주호는 추운 바다 위를 표류할 수 밖에 없었고 다급해진 일당들은 배를 가동시키라고 기관장을 구타했지만 방법이 없었으며 결국 새벽 5시쯤 죽도 인근에서 조업중이던 포리호를 발견해 권총으로 위협해 탈취했으며 포리호가 엔진고장이 발생하자 경흥도 부근에서 유덕도를 탈취해 다시 도주했다. 하지만 이들은 결국 18일 0시30분께 흑산도 서쪽 3마일 해상에서 붙잡혔다.
(월북에 실패한 뒤 검거된 일당들)
이들은 범인들 가족과 제자들로 이루어졌으며 이들중 주범은 4명으로 김사배,정회근,박석운,김경배 4명이었다.
(1) 김사배
당시 34살인 김사배는 한국전쟁중 인민재판소에 부역한 혐의로 징역 6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했으며 1960년 3월 만기 출소한 후 자기 집에 하숙했던 정회근에게 월북을 제안했고 추진했다. 월북행에 데려간 가족은 없었다
(2) 정회근
당시 26세로 순천여중에서 교사로 근무했다. 친형인 정회천이 6.25 전쟁때 전투경찰에게 피살된 적이 있어서 남한 체제에 대해 큰 반감을 가지고 있었으며 대동한 가족이 제일 많았다.
(3) 박석운
당시 27세이며 정회근의 대학 동창으로 정치학과를 졸업했다. 조선 대학 부속 고등학교의 교사로 있으면서 학내 분규에 적극 개입하여 그해 6월 해고 되었다. 6.25 전쟁 당시인 1951년 공산조직에서 활약한 혐의로 체포되어 광주 포로 수용소에서 1년간 복역한 경력이 있으며 박석운 역시 가족들을 대동했다.
(4) 김경배
당시 34세로 알려졌으며 1958년 정화여중 교사로 임명하여 그해 교감 서리가 되었다. 공식적으로는 전남대 문리과 대학을 졸업했다고 알려졌지만 실상은 부역전과가 있었으며 학력과 연령도 위조했다. 본명은 김영배로 나이는 29살이며 학력도 경남 대학교 문리대 정치과 2년 수료한 것으로 들어났으며 처와 여동생을 대도했다.
납치 주모자들중 3명이 교사여서 납치범 일당들 중 제자들도 상당수 있었으며 특히 정회근과 박석운이 자신들의 제자들을 거짓으로 속여서 정회근이 10명의 제자를 박석운이 5명의 제자를 대동했다. 이들 대다수가 속아서 이 배를 탄거지만 이들 중 네 다섯명은 월북 계획을 알고 적극 가담했다.
체포된 납치범 일당들은 재판에 넘겨졌으며 이들 중 주범인 김사배,정회근,박석운 3명은 사형이 선고되었다. 이들은 항소와 상고를 했지만 기각되었고 사건 발생 6년 뒤인 1966년 11월 30일 서울 교도소에서 이들 3명의 교수형이 집행되었다.

등록 영상 로딩 최적화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