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평통보 이전에 조선 화폐
0. 여말선초의 화폐
고려시대에는 시중에서 흔히 쓰이는 기준화폐로서 포布, 쌀, 은 등이 통용되었다. 그중에서도 고려 말에는 5승포라는 것이 실질적인 교환수단으로 자리잡았는데, 1승은 80올이므로 곧 5승포는 400올로 짠 면포를 의미한다.
조선이 건국된 이후에도 실질적으로 통용되는 기준화폐는 포였는데,
그중에서도 5승 35척 이상의 포를 정포(正布)라고 불렀다. 이 정포와 쌀이 15세기 말까지 화폐로 통용되었다.
물론 당시에 정포만이 통용되었던 것은 아니다. 정포 이외에 다양한 규격을 가진 포들이 있었고
특히 9승이나 10승으로 만들어진 저포도 존재하였으나
이런 것들은 실생활에서 쓰기보다는 고급품목으로서 소비되거나 외교용으로 쓰였다.
1. 태종 이방원과 저화
이런 상황에서 태종 이방원은 총 두 차례에 걸쳐 저화(楮貨) 유통을 추진했다.
저화는 지폐를 의미하는데, 고려 말에 이미 저화 발행 시도가 있었으나 실패했다.
이방원은 왜 저화를 발행했을까?
전통적인 시각에서 논의되던 것이 소위 말하는 이른바 '화권재상론'이다.
즉 고려 말 이래 지속된 정부의 화폐정책 주도권 상실을 극복하고
다시금 국가 주도로 화폐정책을 시행하기 위한 시도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에서는 이방원이 저화를 화폐 유통을 목적으로 발행하였다고 본다.
반면 비교적 최근에 제기된 견해는 다소 다르다.
소순규 교수가 제기한 견해인데, 2019년 논문에서 저화 발행의 목적을 화폐 유통이 아닌
재정 충당이었다고 보았다.
즉 재정적자를 메꾸기 위한 일종의 시뇨리지였다는 것이다.
둘중 어느 입장을 채택하던, 이방원은 포와 쌀을 적극적으로 저화와 교환하도록 하며 적극적으로 저화를 발행했다.
이로 인해 발행 초기에는 저화가 백성들 사이에서 정착했다는 언급이 나오기도 했으나
돌연 저화를 폐지했다가 다시 발행하는 등의 시행착오를 거쳐
화폐로서의 신뢰도와 가치가 땅에 떨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무엇보다 저화는 포와 달리 그 자체로는 아무런 쓸모가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이후 세종도 저화 발행을 시도하는데
이때는 확실히 화폐유통 시도였지만, 저화에 대한 낮은 신뢰도와 미숙한 정책으로 인해 실패했다.
2. 16세기 초 - 추포와 상포의 등장
아무튼 저화 발행의 실패로 인해 15세기 말까지는 정포와 쌀이 기축통화 지위를 유지했다.
그런데 16세기가 되자 민간의 화폐사용은 변화하는 양상을 보인다.
가장 큰 특징은 포 화폐가 분화하기 시작한 것이다.
먼저 등장하여 빠르게 퍼진 것이 바로 추포(麤布)이다.
추포는 3승 미만으로 만들어진 포를 말하는데, 정상적인 옷감으로 사용하기 어려울 정도로 질이 낮았다.
그럼 조선인들은 왜 이런 질나쁜 옷감을 화폐로 사용했을까?
첫번째로 상품화폐경제의 발달을 들 수 있다.
지방에 장시가 개설되기 시작하고, 서울에서도 15세기 후반부터 시전이 크게 확대되어
성종 대에는 국가 주도로 시전을 강제로 재배치하다가 반발한 일부 시전 상인들에 의해 투서가 날아들며
큰 사건으로 연결되는 일까지 있었을 정도였다.
아무튼 이런 상업 발전으로 인해 기존의 5승포 대신 소액화폐가 필요해졌고, 여기에 부합하는 것이 바로 추포였던 것이다.
두번째로, 대외무역의 확대도 들 수 있다.
<틀린 그림은 아니지만 은 중개무역이 나와있지 않아서 조선이 명에 은을 수출하는 것처럼 보인다>
태종-세종대 이후 조선 정부는 밀무역과 사무역을 강하게 억제하는 정책을 취했지만
성종 대 이후가 되면 사무역의 성장은 이미 막을 수 없는 흐름이었다.
대중무역에서는 중국으로 보내는 사행단 사이에 경상과 송상들이 이끄는 사무역단이 끼어서 따라가는 것이 관례처럼 정착되었다.
대일무역 역시 양적으로 엄청나게 성장하여 삼포에 정착한 왜인들의 수가 크게 늘어났고,
서계를 위조하는 등 여러 문제로 번지기도 했다.
특히 이중에서 대일무역이 중요하다.
그 이유는 일본인들이 조선산 면포를 엄청나게 사갔기 때문이다.
면포에 대한 교환품목으로서 일본은 구리를 조선에 엄청나게 수출하였고,
그 결과 연산군 6년(1500년) 한해에만 일본에서 조선으로 11만근에 이르는 구리가 유입되었다.
여기에 16세기 이후 정비된 부세 수취체계에서 부세의 포납화가 이루어지면서
조선 국내 포 수요가 급증하였고, 이에 따라 포화가 분화되어 추포가 탄생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외에 이 시기 등장한 주요 화폐로 3승포 혹은 4승포로 이루어진 이른바 상포(常布)나
추포 중에서도 특히 질이 안좋았던 악포(惡布) 등이 유통되었다.
이렇게 질이 안좋은 포화들이 시중에 늘자 조선 정부는 악화로 인한 상품가치 저하를 우려해
여러차례 규제책을 시행했지만, 큰 효과를 보지 못했다.
3. 중일 중개무역의 번성과 포화의 소멸
16세기 경제사를 설명함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중일 중개무역이다.
16세기에는 잘 알려져 있듯 일본에서 전국시대가 개막하면서 지방 다이묘들이 서로 조선과 교역하고자 했고
그 중에서도 현 야마구치 현의 오우치 가문은 본인들이 백제 왕족의 후손이라고 주장했을 정도로 적극적이었던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런 정치적 상황은 조선에 예상치 못한 추가적 이득을 가져다 주었다.
일본이 명나라와 직접 교류할 방법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다만 일본의 대명 사행 자체는 1547년까지 계속되었고, 왜구를 중심으로 명나라와의 밀무역이 성행하기는 했음)
그래서 일본은 명나라와 교류하기 위해 조선을 거쳐가는 방법을 택했다.
이즈음 일본은 우리나라에서 건너간 회취법의 성공으로 이와미 은광에서 잭팟이 터져 은 생산량이 폭등하였는데
일본인들이 교역 대금을 은으로 치르기 시작하면서 조선을 통해 명나라로 엄청난 양의 은이 유입된다.
그래서 이 시기는 17세기 초중반과 함께 일본에서 유입된 은이 화폐로 사용된 조선사상 흔치 않은 시기이기도 하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기존 화폐들을 밀어낼 정도로 많이 쓰였냐 하면 그건 아니지만 말이다.
아무튼 이런 일본산 은 유입으로 우리나라 은광개발이 치명타를 입는 부작용도 있긴 했지만
전체적으로 16세기의 중개무역은 조선에 있어서 이득이 더 컸다.
사실 위에서 말한 악포도 이런 배경 속에서 등장한 것이다.
4. 16세기 중후반 - 중개무역의 붕괴와 추포의 소멸
이런식으로 계속되던 중개무역은 16세기 중반 이후 침체하기 시작하고, 이와 동시에 조선 화폐사 역시 변곡점을 맞는다.
원인은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큰 것은 서양세력의 등장이었다.
아까 전에 조선이 중일간 중개무역으로 번성하였다고 했는데, 사실 한중일 삼국을 연결하는 핵심적인 역할은 류큐 상인들이 맡았다.
그런데 1570년경 포르투갈 상인들이 나가사키항에 정착하면서, 포르투갈의 중개 하에 중일간 중개무역의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이 여파로 조선의 중개무역으로 인한 이득이 급감하였음은 당연지사이다.
게다가 조선 내부에서의 변화도 있었다.
악포가 지나치게 남발되면서 포화 자체의 가치가 떨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은의 유입이 증가한 덕분에 포의 유출이 늘어나 악포가 유통되기 시작했는데, 정작 은의 유입이 급격하게 줄어들면서 포의 유출도 줄어들었고
이로 인한 포화의 가치 폭락은 악포, 더 나아가 추포를 쓰임새를 감소시켰다.(추포가 완전히 사라졌다고 보기도 하는데 실제론 숙종 시기까지는 여전히 쓰였던 것으로 보임)
이로 인해 16세기 중후반 이후 쌀이 주된 교역화폐로 급부상하였고, 시중에서는 상포가 주류로 자리잡았다.(다만 정포/상포 비율은 지역차가 심해서 진지하게 받아들이지는 않길 권함)
그래서, 이 시기 이후의 민간에서의 거래문서 같은 것을 살펴보면 고액거래 시에도 정포가 아니라 상포를 사용하는 모습들이 관찰된다.
서울에서는 17세기 벽두까지 은화가 사용되기도 했지만, 지방은 그렇지 못했다.
5. 17세기 초 이후 - 중개무역의 부활과 인삼의 등장
포르투갈 상인이 등장한 이후에도 임진왜란, 세키가하라 전투 등 정치적 격변을 겪으며 복원되지 못한 중개무역은
일본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집권하며 정세가 안정되자 본격적으로 재개되었다.
에도 막부가 쇼쿠호 정권과 달리 서양과의 교역을 제한하는 정책을 취하기도 했고
명나라가 대외전쟁으로 인한 은 지출을 메꾸기 위해 조선에 은을 요구하면서
조선 정부의 은 수요가 높아졌고, 그 수요를 일본과의 교역을 통해 메꾸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17세기의 중개무역에서는 이전과 달리 조선의 화폐가치에 급격한 변동이 일어나지 않았다. 왜 그럴까?
그렇다. 바로 인삼 덕분이다.
물론 이 시기 조선에서 일본으로 수출하는 물품의 80% 정도는 중국에서 수입한 백사와 비단을 재수출하는 것이었다만
실제로 조선에 더 큰 이득을 안겨준건 인삼 수출이었다.
그래서 조선의 면포와 일본의 은을 맞교환했던 이전과 달리, 17세기에는 인삼과 은을 맞교환하는 양상이 일어난다.
덕분인지 몰라도 17세기의 포화 가치는 (지역별로 사용 빈도의 차이는 상당했지만) 이전처럼 급격한 변동을 겪지는 않았다.
아무튼, 중개무역의 재개로 인해 일본산 은이 다시 유통되면서 서울을 중심으로 몇몇 도시권에서 은이 다시 주류로 자리잡았다.
다만 이 당시 화폐사용 비율은 지역차가 상당했는데, 주로 호남은 포화를 거의 사용하지 않고 쌀을 사용한 반면 영남에서는 포화, 그중에서도 정포를 주류로 사용하였다.
6. 17세기 중반 이후 - 동전의 등장
이와는 별개로 마지막으로 하나 더 짚어봐야 할 것이 있다.
바로 17세기 중반 이후 본격적으로 유통되기 시작한 동전이다.
화폐 유통은 일찍이 대동법의 거두인 김육이 강하게 주장한 바 있었는데, 그 결과 서북 지역에서는 화폐 사용이 꽤 늘어났지만
서울이나 삼남도에서는 여전히 은이나 쌀, 포화에 밀려 사용되지 못했다.
거기다가 17세기 중후반 조선을 덮친 경신대기근은 화폐의 유통을 더더욱 늦추었다.
하지만 1670년대를 지나며 일본의 은 유출 통제책으로 인해 은의 유입이 줄어들자 조선 상인들은 은 대신 구리를 수입해 오기 시작했다.
덕분에 동전 주조가 쉬워지자 수도권을 중심으로 동전이 퍼져나갔고,
1690년대에 일본이 화폐개혁을 행해 악화를 발행하기 시작하자 영남지방에까지 동전이 퍼져나갔다.
물론 이후 을병대기근의 여파로 인해 화폐 주조가 중단되는 사태가 있기는 했지만,
1700년대가 되면 쌀을 사용하던 호남에서도 동전이 거래수단으로 퍼지는 등 동전은 의외로 수월하게 퍼져나갔다.
그 결과 18세기 중반 이후가 되면 드디어 전국적인 화폐 정착이 이루어진 것이다.
상평통보 정착의 의의는 생각보다도 더 큰데, 바로 조선 전역이 동일한 경제적 네트워크로 묶였다는 것이다.
이전에는 위에서 잠깐 살펴보았듯 지역별로 주로 쓰이는 화폐가 달랐다.
은화는 서울에서는 많이 쓰였지만, 지방에선 찾아보기가 몹시 힘들었다.
이렇게 지역별로 분절된 화폐 환경에서는, 전국적인 경제권 통합을 이루어내기가 매우 힘들다.
하지만 18세기에 이르러 전국적으로 상평통보가 유통되면서, 조선 8도가 하나의 통합된 시장으로 묶인 것이다.
이는 화폐 유통이 이전 시기보다 더 높은 차원의 상업 발전과 거상의 출현을 가능하게 했다는 말이 된다고 할 수 있다.
<참고자료>
우리역사넷
동북아역사넷
소순규(So Soon-kyu). "조선 태종대 저화 발행 배경에 대한 재검토 - ‘화폐정책’이 아닌 ‘재정정책’의 맥락에서." 역사와 담론 0.92 (2019): 111-159.
朴平植(Park Pyeongsik). "조선전기 상업사의 이해 시각." 역사교육 155.- (2020): 257-278.
李正守. "16세기 중반~18세기 초의 貨幣流通 실태-生活日記類와 田畓賣買明文을 중심으로-." 조선시대사학보 32.- (2005): 95-148.
유현재 ( Hyun Jae Yoo ). "16세기 추포 유통과 그 성격." 한국사론 52.- (2006): 73-127.
기타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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