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레즈미: 일본 문신의 역사
이레즈미: 일본 문신의 매혹적인 역사
문신은 전 세계적으로 복잡하고도 논쟁적인 역사를 지니고 있다. 한때 신성하고 문화적인 자기표현의 수단이었던 문신은, 근대화와 식민주의의 도래로 인해 급속히 낙인찍히고 말았다.
문신이라는 예술 형태를 ‘처음으로’ 창조한 국가는 없다. 고대 그리스 도자기에는 문신을 한 트라키아인들이 묘사되어 있으며, 이탈리아 산맥의 빙하 속에서 발견된 5,300년 된 미라의 몸에는 무려 61개의 문신이 새겨져 있었다. 이 미라는 ‘빙하인간 외치(Ötzi the Iceman)’라는 별칭으로 불리며, 문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가장 오래된 실질적인 증거로 꼽힌다.
그 외에도 알래스카, 몽골, 그린란드, 이집트, 중국, 수단, 러시아, 필리핀 등 49개 지역에서 문신이 새겨진 미라나 유골이 발견된 바 있다.
하지만 1400년대에 이르러 문신은 유럽 식민주의자들이 ‘야만적’이라고 규정한 원주민들과 자신들을 구분짓는 수단으로 활용되기 시작했다. 오늘날에는 문신에 대한 매력과 낙인이 동시에 존재한다. 드웨인 ‘더 락’ 존슨이나 리아나 같은 유명 인사들은 문신을 자기표현의 수단으로 사용하며, 반면 일부 사회의 부적응자들은 갱단 소속이나 범죄 이력을 나타내기 위해 문신을 새긴다. 대표적으로 살인자들이 흔히 새기는 ‘눈물방울’ 문신이 있다.
일본의 문신 역사도 이와 유사하면서도 독특하다. 세계 다른 지역들과 마찬가지로, 일본에서도 문신은 한때 깊은 의미를 지녔으나, 근대화의 흐름 속에서 점점 낙인으로 전락하게 된다.
1800년대 후반, 일본은 문신을 전국적으로 금지하는 한 걸음 더 나아간 조치를 취했다. 그리고 문신이 범죄와 연관된다는 인식은 일본에서 특히 더 강하게 자리 잡았다. 이는 문신이 범죄자들에게 형벌과 낙인의 수단으로 활용되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일본의 온천, 호텔, 헬스장 등에 들어가 보면 문신 노출을 금지하는 표지판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이는 전신 문신으로 유명한 일본의 마피아 조직, 야쿠자와 문신이 강하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일본 내 호텔과 온천의 약 56%가 문신 있는 방문객의 출입을 거부한다.
이레즈미와 와보리의 차이
이레즈미는 일본어로 ‘문신’을 뜻하지만, 전통적인 일본 문신 스타일은 ‘와보리’라 불린다. 이 스타일은 5,0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역사를 지니며, 시각적으로 대담하고 화려하다.
이는 예를 들어, 알래스카의 이누피아트 원주민들이 새긴 패턴 기반 문신처럼 추상적이지 않다. 대신, 와보리는 자연, 전쟁, 신화, 에로티시즘을 묘사한 정교한 그림문신으로, 일본의 목판화 예술인 우키요에(浮世絵: 뜨는 세계의 그림) 장르에서 그 소재를 가져온다.
위에서 언급된 장면은 우키요에 예술가 구니요시가 그린 『수이코덴 108명의 영웅』이라는 목판화 시리즈에서 가져온 것으로, 와보리 문신의 대표적인 도안 중 하나이다.
그 외에도 가부키 배우나 요괴(예: 용, 오니 등) 같은 신화적 존재들이 인기 있는 문신 소재다. 특히 오니는 붉은 얼굴의 도깨비로, 오늘날 이모지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사무라이와 ‘왜’의 남자들
고대 일본에서는 남성들이 얼굴과 몸에 부족 고유의 디자인이나 보호 부적을 문신으로 새기곤 했다. 일부 기록에 따르면, 사무라이들은 전쟁터에서 자신을 식별하기 위해 문신을 새겼다고 한다. 이는 오늘날의 군번표와 유사한 기능을 한 셈이다.
홋카이도 지역에 살던 아이누족과 같은 일본의 토착 부족들 사이에서도 문신 문화가 존재했다. 이들은 미용적, 종교적, 사회적 이유로 문신을 했으며, 주로 여성들에 의해 수행되었다. 특히 성숙의 표시로 사용되었다는 점이 흥미롭다.
위에서 언급된 장면은 우키요에 예술가 구니요시가 그린 『수이코덴 108명의 영웅』이라는 목판화 시리즈에서 가져온 것으로, 와보리 문신의 대표적인 도안 중 하나이다.
그 외에도 가부키 배우나 요괴(예: 용, 오니 등) 같은 신화적 존재들이 인기 있는 문신 소재다. 특히 오니는 붉은 얼굴의 도깨비로, 오늘날 이모지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사무라이와 ‘왜’의 남자들
고대 일본에서는 남성들이 얼굴과 몸에 부족 고유의 디자인이나 보호 부적을 문신으로 새기곤 했다. 일부 기록에 따르면, 사무라이들은 전쟁터에서 자신을 식별하기 위해 문신을 새겼다고 한다. 이는 오늘날의 군번표와 유사한 기능을 한 셈이다.
홋카이도 지역에 살던 아이누족과 같은 일본의 토착 부족들 사이에서도 문신 문화가 존재했다. 이들은 미용적, 종교적, 사회적 이유로 문신을 했으며, 주로 여성들에 의해 수행되었다. 특히 성숙의 표시로 사용되었다는 점이 흥미롭다.
메이지 유신기
보케이 정책은 폐지되었지만, 1872년 일본 정부는 문신 전체를 금지하는 국가적 조치를 도입했다. 도쿠가와 막부가 무너진 후, 일본은 세계 무대에 문을 열었고 (이는 영화 《라스트 사무라이》를 통해 간접적으로 접한 적이 있을 수도 있다), 그간 단절되었던 기술들을 빠르게 수용해야 했다. 이에는 증기기관, 전신기, 현대 무기가 포함되어 있었다.
근대 국가로서의 이미지를 강조하려던 일본 정부는 문신을 철저히 단속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정부는 아이누족과 같은 소수 민족을 집중적으로 탄압하며, 일본 국민을 단일한 정체성으로 통합하려 했다. 하지만 차별받던 부라쿠민 계층 출신이 주류였던 야쿠자들은 이레즈미 문화를 몰래 이어갔다.
제2차 세계 대전
2차 세계대전 중에는 문신 수요가 급증했다. 징병을 피하기 위해 일반 시민들마저 이레즈미를 새겨 ‘불량자’처럼 보이려 했던 것이다. 전쟁 이후 일본에 주둔하게 된 수천 명의 서양 병사들은 이레즈미의 예술성과 복잡함에 매료되었다.
이에 따라 메이지 정부는 외국인에게는 문신 금지령을 예외로 적용하며, 요코하마, 고베, 나가사키 등지의 이레즈미 장인들이 외국인 고객을 상대로 활동하는 것을 허용하게 되었다.
결국 1948년, 문신 금지는 공식적으로 해제되었다. 대신 정부는 ‘의료행위법’을 도입해, 의사 면허가 없는 자는 문신 시술을 포함한 모든 ‘의료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고 규정했다.
하지만 이 조치 이후에도 낙인은 여전했다. 특히 1960년대 야쿠자 영화들이 인기를 끌며, 이레즈미와 갱단의 연관성이 더욱 강화되었다.
현재
2014년 기준, 일본에는 약 3,000명의 문신 시술자가 활동하고 있었으며, 이는 1990년의 200명에 비해 급격히 증가한 수치다. 야쿠자 내에서 이레즈미의 인기가 감소함과 동시에, 외국인 관광객, 기업인, 유명 인사, 예술가들 사이에서 문신의 수요는 오히려 증가하고 있다.
그러나 2020년, 타이키라는 32세의 한 남성이 세 명의 고객에게 문신을 새겼다는 이유로 191만원의 벌금을 부과받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일본 대법원은 사상 처음으로 문신을 ‘의료행위’가 아닌 ‘예술행위’로 인정하였다. 이는 수백 년 만에 문신 시술이 합법화된 것이며, 이레즈미가 일본의 위대한 예술 및 문화 표현 형식 중 하나임을 공식적으로 인정한 역사적 판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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